2021. 7. 14. 10:12ㆍ끄적이다

이십대의 나는 꿈이 없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무슨일을 하고싶은지 알지못했다.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도 자퇴했다. 무엇을 공부해야하는지 모른채 학교를 다니는 건, 무의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래보다 조금 일찍 일을 시작했다. 생계를 다 감당해야했던 엄마의 부담을 덜어줘야 했고, 가난에 찌들어 있던 삶이 싫었다. '열심히 일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한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5년을 일하면서 자본주의의 민낯을 봤다. 경쟁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 누군가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본주의가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협동조합이 눈에 띄었고 막연하게 협동조합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자연스레 생협에 마음이 갔고 생협에서 일하고 있던 선배의 제안으로 홍보팀에 입사했다. 당시 나는 기획안 한 장 제대로 쓸 줄 모르는 풋내기였는데, ‘생협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지와 '사진기술이 있다'는 두가지 이유로 팀장과 상무이사를 설득해 나를 뽑았다. 자신이 책임지고 가르치겠노라 하고 말이다.
선배와 팀장은 회사에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잘하려는 욕심이 많았고 재주도 많았다. 인력이 적고 일이 많은 조직이라 한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일은 범위가 넓고 양이 많았다. 두사람은 나를 혹독하게 일을 가르쳤다. 무엇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기획안이 5~6번씩 까이는건 일상이었고 기사를 처음부터 다시 쓰는 일이 허다했다. 매일같이 신문에서 제목을 베껴 쓰게 했고 매주 책을 읽고 서평을 쓰게 했다. 나는 가진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힘들어도 고마운 마음으로 일을 배웠다.
격주로 발행하는 소식지를 만드는 일은 재밌었지만, 일이 많고 고되었다. 마감 때면 늘 야근을 했고 밤을 새운날도 많았다. 늦은 새벽, 퇴근하고 돌아가면 언제나 아이는 울고 있고 아내는 지친 얼굴로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우는 아이를 받아 안고 다시 나와 집 앞을 뱅뱅 돌며 재우곤 했다. 그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내도 그 힘든 시간을 묵묵히 함께 버텨줬다. 나는 모두의 배려와 사랑을 자양분 삼아 조금씩 자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서야 한사람의 몫을 제법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에이스는 아니지만, 풋내기에서 벗어 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기획안의 빨간 줄은 사라졌고, 기사엔 약간의 첨언만 달렸다. 몇년이 지나 두사람은 퇴사했고 나는 팀장이 되어 팀원에게 일을 가르치는 사람이 됐다.
생협에서 5년 6개월을 일하고 지금은 작은 공정무역 회사에서 일한다. 규모가 작은 회사기에 1인 팀으로 홍보, 마케팅에 관련된 모든 일을 혼자서 한다. 사수도 없고 팀원도 없이 넓은 분야의 일을 밀도 있게 해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전혀 몰랐던 내가 이렇게 일 할 수 있게 된 건, 다 두 선배 덕분이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